기대를 하면서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묘한 심리상황으로 접한 영화였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올해에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었기에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서 흥미가
반감될 것이라는 생각.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감동적으로 읽은 그
소설의 인물들이 영상 속에 되살아 난 것을 지켜보는 것도 흐뭇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기대와 무기대의 혼란속에서 관람한 영화.
결과는 예상밖의 대박이었다.
영화도 영화지만 처음 와본 이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가본 몇 개의 극장들 중에 영화의 전당의 하늘연극장은 생각 외로 크고 웅장했고 상영되는 영화의 화질 또한 끝내 줬다. 그게 본 영화를 더 몰입해서 잘 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 듯. 극장 때문인지 영화를 원래 잘 찍어서 그런지 영상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 특징이다. 매우 풍성한 색감과 따뜻함이 화면에서 배어 나왔다. 와~~ 하는 탄성이 흘러 나올 정도? 앞으로는 극장도 좀 좋은 데로 찾아 다니면서 봐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순간이었다.
우선 <용의자X>는 원작의 정신을 잘 살리면서 영화로써의 좋은 변화를 가미했다. 원작의 주요 인물인 유가와를 배제하였으나, 형사 민범이 원작의 구사나기 형사와 유가와의 조합된 모습으로 등장했다. 민범 역의 조진웅의 연기 훌륭했다. 원작의 여주인공 야스코를 맡은 화선의 이요원, 뭐 훌륭한 야스코의 재탄생이다. 원작의 그녀보다 더 분위기 있고 우아하다고 봐야 할 듯. 원작보다 그녀의 모습이 좀 더 두드러진다. 그녀의 연기도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우리의 슈퍼히어로 류승범... 그를 은근히 나의 히든 카드로 아끼고 지내왔는데... 이번에 아주 지대루... 대박을... 꺼으꺼으...맡은 배역 자체가 워낙 강렬하고 심금을 울릴 눈부신 것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그 역을 맡을 이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류승범은 천재 수학자 고교선생 이시가미를 맡을 완벽한 선택이라고 본다. 싱크로율 100%. 류승범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이 정도면 <광해>와도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 본다. 설마 올해 연기 대상까지? ㅋㅋㅋ
원작에 비해서 멜로 쪽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눈에 보이는 그런 드러남이 다소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작에 배어 있는 침묵과 여백 속의 강렬한 지고지순의 사랑과 막판 임팩트를 생각한다면 꼭 뭐라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런 재해석과 재탄생의 과정을 지켜 보는 것은 즐거웠다. 원작을 알고 보는 상황이라 전개되는 내용들에 의한 심리적 동요나 흥분 같은 것은 물론 적었다. 그러나 류승범이 석고로 나오는 순간부터 내 마음은 이미 그 소설속의 마지막 순간이 재부팅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시가미... 너였구나... 원래 돌심장을 자부하는 터라 웬만한 슬픈 영화 봐도 뽀송뽀송한데 아니 원작까지 읽어서 다 아는 내용의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눈물샘이 자극될 줄이야... 사방에서는 곡을 해대고...
도대체 이 영화를 원작 소설을 읽지 않고 접한 관객들의 감동은 얼마나 어마어마 했을까? 부러웠다. 젠장. 원작을 보고도 이 정도인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관에서 처음보는 현상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영화가 감동적으로 끝나고 자막이 올라간다. 다소 호흡을 다스리느라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 좀 나간 다음에 나가야지... 웬걸? 아무도 안움직인다. 그 커다란 3층짜리 하늘연극장에서 말이다. 껌껌해서 그런가? 좀 더 앉아 있다가 일어 났다. (2층에 있었음) 헉. 계단에서 돌아본 순간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아직도 모두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다시 앉기도 쪽팔리고... 그냥 문쪽으로 걸어 나가는데 안내원도 마치 문을 안열어줄 듯한 포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자막이 다 올라갔다. 그리고 관객들의 우렁찬 박수가 쏟아졌다. 아... 나는 문화인 되기는 글렀다.
영화의 감동도 아주 짙고 이것 저것 할 말이 많이 머릿속을 맴도는데 자꾸 떠들면 스포 될 것같고, 이 정도면 영화의 감동은 충분히 전달하였을 거라고 믿으므로 리뷰를 끝맺는다. <용의자X>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이거 보고 감동 안받으면 뭔가 문제 있음. 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