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정이현의 해석남녀 이 영화는, 뭍으로 간 섬마을 인어공주의 고단한 후일담이다. 1970년대, 비바리들의 해산물 채취가 주 수입원인 도서벽지에서 우체부 청년은 동네 최고 킹카일 수밖에. 그 총각, 월급 또박또박 받는 체신 공무원일뿐더러 허우대도 몹시 수려하고 심성 또한 비단결이다. 오죽하면 이름 마저 ‘진국’이랴! 섬 처녀 연순이 그를 오매불망 ‘겁나게’ 연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그 마을에는 꽃다운 나이의 활력 넘치는 처녀 연순이 마땅히 연애를 걸어 볼만한 다른 상대도 없었으므로. 어쨌거나. 멋진 청년 진국과의 결혼에 골인했을 때 섬 마을 처녀는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을 것이다.
눈부시게 착한 ‘킹카’ 무능한 중늙은이로
아~ 무정한 세월이여 그러나 세월은 과연 무정하나니, 30 여 년의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싱그럽던 해녀 처녀가 그악스런 목욕 관리사(일명 ‘때밀이 아줌마’)가 된 것보다 더 충격적인 변화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청년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망가진 채 폭삭 늙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남의 빚 보증으로 월급이 차압되고 딸년 등록금까지 날려 버릴 만큼 무능한 아버지, 마누라의 패악에 맞서지도 못하고 눈만 끔벅끔벅하는 중늙은이, 볼일 본 다음 바지 지퍼 올리는 걸 잊을 만큼 어눌한 그 초로의 사내는 오직 어두컴컴한 방안의 텔레비전 앞에서만 바보천치처럼 허허 웃는다.
하지만 자식은, 우리는, 그를, 아버지를, 증오할 수가 없다. 도저히 미워할 수도 없다. 아버지는 오입질을 하지도 않았고 엄마를 구타하지도 않았다. 술 주정도 하지 않았고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과장 발휘하여 식구들을 억압하지도 않았다. 그의 원죄는 오직 하나. 한 때는 눈부신 장점이었을 그것. 착한 사람이라는 것뿐이니까. 구성원 내부의 윤리적 악행이나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철저하게 거세된 채, 이 선량한 가장이 이끄는 가족의 경제적 빈곤은 ‘착한 사람에게 유난히 가혹한 운명 탓’으로 돌려진다. 그러므로 <인어공주>의 아버지는 오욕칠정을 가진 살아 숨쉬는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구부정한 뒷모습 혹은 고요한 정물(靜物)로만 존재한다. (또한, 50대 이후 연령의 인권 차원에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남성을 ‘해사한 젊은이 vs 추레한 늙은이’로 재현하는 것은 여성을 ‘성녀 vs악녀’로 이분 화시키는 것처럼 상투적인 도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착하고 무기력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원죄처럼 짊어지고 살아온 나영이 가난한 고아 출신 남자와 애인 사이라는 점이다. 나영과 그 가족을 늘 따뜻이 감싸 안아주는 더 없이 착한 그 청년은 먼 훗날 어떤 남편이 되어 있을까. 젊은 부모의 동화 같은 로맨스는 어쩌면, 자신의 누추한 선택과 불안한 미래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나영의 무의식적 자기주술일 것이다. 비루한 현실 뒤에 실은 시원(始原)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니 삶을 긍정하고 이해하라는 이 영화. 그 소박한 위선(僞善)의 진정성은 대대손손 이어지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