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당첨금 244억 앞에 속앓이하는 소탈한 서민형 대통령 김정호(이순재)'
'강렬한 카리스마 그러나 첫사랑 앞에선 소심한 꽃미남 싱글 대통령 차지욱(장동건)'
'서민 남편의 대책없는 내조로 이혼 위기에 처한 최초의 여자 대통령 한경자(고두심)'
3명의 최고 통치자가 펼치는 3가지 에피소드로 상상하지 못했던 대통령을 만난다.
‘대통령’을 소재로 만든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드디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베일을 벗었다. 그동안 킬러와 조폭, 간첩, 경찰, 사형수 등 다양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엉뚱하고 인간적 캐릭터를 만들어 왔던 장진 감독이 이번엔 ‘대한민국 대통령’을 소재로 돌아왔다.
권위의 상징을 친근한 존재로 끌어내리는 ‘굿모닝 프레지던트’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굿모닝 프레지던트'ⓒ PIFF
장진 감독의 말을 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철저한 오락영화, 상업영화”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통령이 만약 로또 복권에 당첨된다면? 싱글남 대통령도 사랑을 하고 싶을까? 대통령에게도 스팸메일이 올까? 다소 엉뚱한 ‘장진 식 발상’은 유쾌한 시선을 통해 권위의 상징인 대통령을 친근한 존재로 끌어내린다.
로또에 당첨된 대통령 김정호가 남 몰래 노후설계를 짜는 장면이나 남성 영부인 창면이 주부의 날 행사에 참가해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선 절로 웃음보가 터진다. 120분 토론에서 벌어지는 난상토론이나 비서관들이 주고받는 대화 장면은 위트가 넘친다.
청와대 관저의 사생활과 비서실, 보좌진, 전속 요리사, 경호원 등을 통해 투영되는 이른바 ‘청와대 라이프’는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특수공간이 만인에게 공개되면서 고정관념까지 깨어지는 순간이다.
배우의 맛깔스런 연기도 관객의 영화몰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4년만에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영화계에 복귀한 장동건은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차지욱 역을 통해 특유의 카리스마와 숨겨왔던 코미디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시트콤과 드라마를 넘어 영화까지 넘나들고 있는 이순재의 연기는 한층 더 물이 올랐다. ‘국민엄마’ 고두심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여성 대통령과 재직 중 이혼이라는 사상초유의 상황에 직면한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주연 못지 않은 조연도 대거 등장한다. 포스터만 보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는 깜짝 놀랄 판이다. 주연급 조연인 임하룡은 사람 냄새 물씬나는 남자 영부인역을 맡아 특유의 따뜻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 외 박해일부터 공형진, 이문수, 이해영, 주진모, 류승용 등 실력파 연기자들이 등장, 개성넘치는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대통령에 대한 따뜻한 우화와 날카로운 위트가 담기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오락영화 이상의 것들이 숨겨져 있다. 장진 감독도 8일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기자시사회에서 “풍자정신으로 뭔가를 꼬집거나 했다면 대중영화의 판도 안에서 살짝 건들고 가는 수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그것이 ‘살짝’인지 ‘큰 부분’인지에 대해서는 관객이 평가할 몫이다.
영화 속에는 밀짚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며 걷는 대통령이 등장한다. 이 대통령은 자신에게 옥고를 치루게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해 광복절 특별사면을 단행한다.
이어 쓰러진 대통령의 모습과 쾌유를 바라는 시민들의 모습이 오버랩될 때 쯤이면 ‘아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전직 대통령이 병상에 누워있던 장면이 떠오르며 코끝이 찡해온다. 평생 민주화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고 대통령이 된 김정호라는 인물은 당연히 누군가와 닮았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대통령의 모습을 통해선 어떤 대통령의 친서민행보가 떠올려진다. 대통령 차지욱이 시장방문을 계획하는 비서관에게 "떡볶이를 먹는다고 정책이 달라지냐"라고 지적하는 장면은 단순 유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게다가 이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촛불시위다.
냉랭한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모습은 누군가와 대조적이다. 일본의 군사적 도발에 북한이 맞서면서 동해상에 일촉즉발의 긴장이 형성된다. 미국은 동해상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영공과 영해를 열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 차지욱은 강대국과 마찰을 무릅쓰며 군사 협조를 거절한다. 그가 일본대사를 청와대에 소환한 자리에서 한 말도 명언이다.
"한국정부를 우습게 보지 마시오. 굴욕의 역사는 가지고 있지만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북간의 신뢰외교로 위기를 헤쳐간다. 냉랭했던 남북관계가 일순간 풀리는 과정이다.
영화 속 대통령 3명은 각각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 5년마다 정권교체가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여야대치와 국회파행, 야당 저격수가 등장하지만 대통령끼리는 다툼과 격식이 없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표현되는 대통령들 간의 관계는 전직 대통령의 투신이라는 안타까운 현실과 비교해 볼 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장진이 영화속 3명의 대통령을 통해 말하려 한 것은?
정치를 하는 대통령에게도 인간적인 삶이 있다. 영화 속 대통령들은 각각의 정치적 고뇌와 결단의 순간마다 부엌을 찾는다. 대한민국 청와대 집무실과 부엌. 뭔가 어울리지 않는 두 공간을 통해 정치하는 대통령과 인간으로서의 대통령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집무실에서는 매 순간 분노와 결단으로 고뇌하지만 부엌에서는 단순함의 지혜와 삶의 방법을 구한다.
장진 감독은 이 영화의 관전포인트를 "국민이 기존 대통령을 보며 느꼈던 답답함과 속이 뻥 뚤리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대통령을 존경할 수도 있고, 대통령과 더 친해질 수도 있으며, 우리가 만나고 싶었던 대통령을 만나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영화"라고도 표현했다.
가장 특별한 존재인 ‘대통령’을 대중영화의 판도 안에서 살짝 건들었다는 장진의 유쾌한 상상. 올 가을 이 영화가 주목되는 건 혼자만의 생각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