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블레이드가 돌아왔다. 현란한
테크노 사운드와 숨쉴 틈 없는 액션, 오직 아드레날린 분비를 위해 태어난 신인류 영화 <블레이드> 시리즈를 해부한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참으로 흥미롭다. 같은 마블 코믹스 영웅들인 <스파이더맨>과 <엑스맨>이
동일한 감독의 적절한 변주 아래 점점 철이 들어가고 있다면, <블레이드> 시리즈는 매번 감독을 교체해가며 '변검'처럼 재빠르고 화려한
변장술만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블레이드>(1998)가 만화 왕국 마블의 첫 스크린 히트작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엑스맨>(2000)이 나오기까지 마블 코믹스에 20년 넘게 영화화되지 못한 걸작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보라. 이상하게도
<블레이드>는 영화가 성공을 거둔 뒤에도 만화로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형식적으로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영화
<블레이드> 시리즈가 지닌 과도한 시청각성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한눈 팔지 않고 유희적 '질주'만을 거듭하는 <블레이드>
시리즈가 어떻게 새로운 시대의 팬덤과 조우하게 됐을까.
신세기 블랙스플로테이션
 <블레이드 3>에서 뱀파이어들의 함정에 빠진 블레이드(웨슬리 스나입스)는 시가지 한복판에서
머뭇거린다. 뱀파이어 사냥만을 목표로 하는 그가 뱀파이어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인간을 실수로 죽여 버린 것이다. 음지의 법 집행자 블레이드의
사회적 입지를 궁색하게 하려는 뱀파이어들은 그 잔혹한 ‘살인’의 광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그때 상공의 헬리콥터가 지상의 블레이드를
추적한다. 헤드라이트만이 밝혀진 이 심야의 살인 장면은 지난 1991년 있었던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장면이 어떤 시사적 논평, 혹은 때늦은 풍자의 기능을 하는 건 아니다. 대개의 블랙스플로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들이 그러하듯
거기에는 그저 쿨한 흑백의 전도만이 있을 뿐이다. 흑인을 뜻하는 ‘블랙’과 선정적이라는 뜻의 ‘익스플로테이션’이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탄생한
블랙스플로테이션 영화는, 백인영웅이 나와서 활약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에서 상황은 그대로인데 주인공만 흑인으로 대체한 영화들을 말한다. 기존에
없던 시도였기에 애초의 타깃이었던 흑인 관객들뿐 아니라 꽤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새뮤얼 L. 잭슨 주연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고든 팍스의
<샤프트>(1971)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블랙스플로테이션 무비는 신화의 시대인 1960년대를 넘어 패션의 시대인 1970년대로 돌입하는 시점에 아메리칸 뉴시네마와 함께 등장했다.
그것은 인종적 자각과 변화하는 시대성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거기에는 말초적인 흑백의 전도와 변칙 누아르 장르에서 오는 키치적
감성이 근간을 이루었다.
<블레이드> 시리즈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흑인 뱀파이어 헌터 블레이드는 흑인인 것도 모자라 검은 가죽 재킷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심지어 검은색 문신으로 전신을 치장했다. 보호색도 이런 보호색이 없다. 주인공 웨슬리 스나입스는 마치 터미네이터 캐릭터에 복장
전이로 유명한 여장 흑인 남성 가수 '루폴'을 섞어놓은 듯한 인물을 연기했다. 루폴은 소위 TV 쇼인 <제리 스프링거쇼>와 함께
천박한(그렇지만 묘한 전복적 쾌감이 숨쉬는) 미국 하위 문화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그런 블레이드가 1편에서는 프로스트(스티븐 도프)가 이끄는
백인으로만 구성된 뱀파이어 무리들을 무자비하게 모조리 처치했다. 처단과 동시에 연기처럼 산화하는 백인들, 거기서 오는 기이한 쾌감은
<블레이드> 시리즈의 백미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바로 이러한 블랙스플로테이션 무비의 SF 블록버스터 버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블 코믹스의 음지
align=left border=0>블레이드는 마블 코믹스의 가장 어두운 안티히어로다. 그가 처음 등장한 것은 <드라큘라의
무덤>(1973)이라는 만화였지만 당시로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흑인 영웅이었던 탓에 평범하게 설정됐고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대신
1990년대 들어 마블 코믹스가 그를 새롭게 디자인해 <나이트 스토커>라는 만화에 근육질의 뱀파이어 킬러로 등장시킨 후 조금씩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마늘로 채워진 은 총알, 은으로 만든 일본도, 그리고 자외선 램프를 든 블레이드는 소위 '데이워커(dayworker)'라 불리는
뱀파이어 퇴마사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는 철저히 주변인이다. 변변한 대사도 없고 언제나 살육의 위협에 시달리는 나약한 존재들일 뿐이다.
<블레이드> 시리즈에서 뱀파이어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마치 생태계의 먹이 사슬 구조에서 인간 위에 존재하는 상위 개체로 그려진다.
뱀파이어 사냥꾼 블레이드는 바로 이 먹이 사슬의 이방인이다. 블레이드는 휘슬러(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 의해 13세 때부터 키워졌다. 한 여인이
임신 중일 때 뱀파이어의 습격을 받게 되고 그녀는 아이를 낳고 숨진다. 그렇게 그 아이 블레이드는 태어나면서 유전적인 변이를 겪었다. 그는
마늘과 은, 햇빛도 견디고 인간처럼 나이도 먹지만, 뱀파이어처럼 여전히 피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언제나 혈청을 소지하고 다닌다. 블레이드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장점을 가졌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일 뿐이다.
<블레이드> 시리즈를 둘러싼 지리한 법정 공방 또한 블레이드가 처한 주변성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영국의 영화 비평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킴 뉴먼은 <블레이드 2>를 두고 "<블레이드> 시리즈가 선명한 크레딧으로 작가 마프 울프먼과 화가 진
콜란의 이름을 밝힌 것이 2편의 가장 반가운 요소"라고 말했다. 그들의 이름은 2편에 이어 3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블레이드는 바로 그들의
작품인 <드라큘라의 무덤>의 조연이었다. 울프먼과 콜란은 마블 코믹스와 뉴라인 시네마에게 흡혈귀 혼혈 슈퍼 히어로인 블레이드를
만들어낸 것이 다름 아닌 자기들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울프먼과 콜란은 <블레이드 2>가
만들어지기 전에 승소를 거뒀다. 그들은 "<샤프트>를 연상시키는 파워풀한 흑인 영웅에다, 뱀파이어 처단자인 브램 스토커의 반 헬싱
교수 같은 다재다능함을 합친, 한편으로 '난센스한'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애초의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테크노와 무협 액션의 하이브리드
 “사람들은 요즘 영화가 만화같이 됐다고 말한다. 항상 그럴까? 나는 마블 코믹스의 인기 만화를 각색한 <블레이드>가 기괴한 컬러와 환영 같은 이미지, 숨 돌릴 틈 없는 액션, 현란한 플롯, 만화란 장르의 특징적 요소인 은밀한
호모에로티시즘을 두루 갖춘 볼 만한 작품이라고 말하게 돼 기쁘다. 특히 올해처럼 할리우드 대작이 별 볼일 없었던 때, <블레이드>는
그야말로 속 시원한 성공적 엔터테인먼트다. 한창 나이의 소년들은 한두 번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고, 영화를 보면서 어린애처럼 좋아한
우리들도 <블레이드>가 새롭고 신나는 경험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필자 앤드루 오히어의
말이다. <블레이드>는 시리즈의 시작과 동시에 격렬한 찬반 양론에 휩싸였다. 엄숙한 평론가들은 ‘알맹이 없는 SF 액션영화’라고
몰아붙였고, 급속도로 결집한 일군의 새로운 팬덤 진영에서는 ‘전에 없던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앤드루 오히어 같은 필자가
뜻밖의 지원 사격을 날린 것이다. 그는 <블레이드>가 영화와 TV, 코믹스와 게임의 변경이 갈수록 엷어져 가는 디지털 시대의 신나는
서막을 열었다고 봤다. 그것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거대한 삼각형의 외곽에서 제4의 길을 찾아낸 워쇼스키
형제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
짐작했던 대로 <블레이드 3> 역시 전편들의 재료를 전부 그대로 써먹는다. 공격적인 성향의 새 뱀파이어 집단이 또다시 전통 위계
질서를 위협하고 블레이드가 과격한 소탕 작전에 나선다. 그 과정에 1편에서 죽었다가 다시 2편에서 살아났던 조력자 휘슬러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2편에서도 그랬듯 블레이드는 휘슬러의 숨겨진 딸 애비게일을 포함해 또다시 일군의 동지들을 만난다. 바뀌는 것은 각종의 현란한 무기들
뿐이다. <블레이드 3>의 격전지 역시 전편들처럼 테크노 음악이 쾅쾅대는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뱀파이어들의 아지트 혹은 열려진 도심으로
변모한다. <블레이드 3>에서 클럽은 등장하지 않지만 사실 <블레이드> 시리즈가 보여 주는 공간 자체가 5.1 채널로
둘러쳐진 거대한 클럽이나 다름없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과거 만화의 상상력과 독일 표현주의의 누아르적 세계관 및 시각적 이미지를 결합하려는
최근 뉴라인 영화사의 시도들 중에서 <다크 시티>와 <스폰>, 그리고 <블레이드>를 각각 1, 2, 3위로 꼽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테크노 비트가 넘실대는 클럽은 바로 <블레이드> 시리즈가 마련한 표현주의적 공간이었다. 그를 바탕으로
형성된 새로운 비트와 액션은 바로 <블레이드> 시리즈가 전혀 다른 팬덤을 형성할 수 있는 이유가 됐다. <블레이드>
시리즈와 비교하자면 이후 만들어진 <매트릭스>(1999~) 시리즈가 받았던 과도한 찬사는 한편으로 과분하다.
 <매트릭스> 시리즈가 게임의 서사 양식과 이미지 조합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일련의 블록버스터
계보를 만들어냈다면, <블레이드>는 이미 그 전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1인칭 비디오 게임을 중심으로 하는 액션의 측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블레이드> 시리즈의 액션은 아예 그 '게임'의 규칙으로 말하자면 '바이오 해저드'식의 학살과
'디아블로'식의 인터페이스가 합쳐진 형태다. <블레이드> 시리즈에서 등장인물들은 철저히 게임 속 '유닛'의 개념으로 등장한다. 몸이
터질 때 살점이 재처럼 퍼져 나가고, 피가 용광로의 쇳물처럼 흘러내리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은 잔혹한 하드 고어 자체다. 마치 그것은 수시로
달려드는 좀비들을 처단하는 1인칭 시점의 게임인 '하우스 오브 더 데드'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블레이드> 시리즈를 선명하게 규정 짓는 것은 웨슬리 스나입스가 보여 주는 홍콩식 무협 액션이다. 그것이 가장 극대화된
것은 2편이었다. 1, 3편과 달리 홍콩제 무술감독 견자단이 참여한 <블레이드 2>의 액션 스타일은 시리즈 중 가장 빼어나다. 비디오
게임의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이 정신없는 몽타주의 영화에서 견자단이 안무한 아날로그의 율동이 접지되는 방식은 무척 흥미로웠다. 모든 액션을
무술감독과 반반씩 상의하는 웨슬리 스나입스는 <블레이드> 시리즈를 통해 당대 할리우드 배우들 중 가장 뛰어난 액션을 선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세 때부터 태권도, 가라테, 쿵푸, 심지어 카포에라까지 익힌 그는 대역 없는 액션에 관한 한 홍콩의 수준급 액션 배우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췄다. 이렇게 <블레이드> 시리즈는 내러티브의 여백을 끊임없는 스타일의 자가 발전으로 무화시키는 묘한 흥분이
있다.
시청각을 흔드는 순수 쾌락 무비
 <블레이드> 시리즈는 바야흐로 DVD 시대가 잉태한 새로운 기준의 주인공이 됐다. DVD 마니아들
사이에서 '당신의 리어 스피커 성능을 확인하려면 <블레이드> 시리즈를 플레이해 보라'라는 말은 이제 흔한 얘기가 됐다. 더구나
<블레이드> 시리즈는 <쎄븐> 등 레퍼런스급 DVD의 명가인 뉴라인 시네마의 효자 타이틀이 됐다. 가령 <블레이드
2>의 경우 해외 유명 DVD 사이트인 DVDSHRINE.COM과 DVDFILE.COM에서 공히 4.5점을 얻었다. 5점 만점을 DVD
팬덤의 마스터피스라고 할 때 최고의 평가를 얻어낸 것이다. 시종일관 어둡게 진행되는 화면은 매체의 명암 대비를 확실히 드러내는 기준이 됐고,
타격음의 분리와 테크노 음악의 격렬한 배치는 시종일관 아드레날린이 분출하게 만들며 전혀 다른 감상자의 기준을 만들어냈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바야흐로 DVD 매체의 대중적 보급과 함께 전혀 새로운 운명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완결편이라고 알려진 3편 개봉과 동시에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참고로 당초 알려진 '3부 완결' 소식과
달리, 시리즈의 제작자기도 한 웨슬리 스나입스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계속적인 속편 가능성을 언급했다. <블레이드>의 때 이른 '원조'
선언과 무색하게 후발 주자인 <매트릭스> 시리즈는 이미 게임 복제 시대 영화의 만신전에 올랐고, <툼레이더>(2001~)
시리즈뿐만 아니라 <블레이드>의 스티브 노링턴 감독이 만든 <젠틀맨 리그>(2003), <언더월드>(2003),
<반헬싱>(2004), 그리고 현란한 '건 카타' 액션으로 웨슬리 스나입스의 기를 꺾어버린 <이퀼리브리엄>(2003)도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로 당장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 태세다. 차례로 <블레이드> 시리즈의 메가폰을 잡았던 모든 감독들이 얘기했듯,
이들은 가상의 시대성과 최소한의 철학적 담론에 앞서 최고의 키치적, 시청각적 체험을 지향하는 1백% 순수 '퍼니(Funny)' 무비 세계의
영화들이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완결 이후 할리우드가 또 한번의 새로운 인식론적 단절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블레이드>는 그 왕좌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후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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