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der=0> |
장장 5년 동안 준비해온 한국 최초의 본격 탐험 영화
<남극일기>가 드디어 대장정에 올랐다. 프로덕션 난이도에 있어 최근 봇물을 이루고 있는 해외 로케이션 영화 중 가장 모험적인 사례가
될 <남극일기>의 지난한 예고편을 공개한다.
무보급 남극 횡단에 도전한 탐험대가 가던 길을 멈췄다. 눈보라도
혹한도 가로막지 못했던 탐험대를 멈추게 한 것은? 대원 중 한 명이 아픈 것이다. 강행할 것인가, 하차할 것인가. 대장은 고민에 잠겼다. 6명
대원 모두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기약이 없다. 인생의 모든 것, 그러니까 5명 인생의 모든 것이 나머지 1명의 인생
때문에 주춤거렸다. 눈보라보다 싸늘하고 혹한보다 냉정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흐른다. 결정권이 있는 대장이 무겁게 입을 뗀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돌아가자.” 대장은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살러 간다
지난해 임희철 프로듀서는 임필성 감독의 권유로 어떤 남극 탐험대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1999년 말 임필성 감독이 영감을 받아
<남극일기>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는 그 다큐멘터리였다. “대원 하나가 다치고 나서 회의를 하는데 아무도 병원에 데리고 가자는 말을 안
했다. 굉장히 싸늘한 분위기였다. 대장이 결정을 내리고 난 후 우는데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억울함과 분노의 눈물이었다.
‘저 새끼 땜에 못 가는구나.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다’ 그런 마음이 읽혔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그런 거다. 정말
무서운 거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왜 산에 오르나?’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 듣기에 멋진 말이다. 그렇다면 남극에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고
가정을 하자. ‘왜 남극에 가나?’ 남극이 거기 있으니까 간다? 남극은 산처럼 거기 있지 않다. 남극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좌표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남극일기>는 남극 도달 불능점 무보급 횡단에 도전하는 대한민국 탐험대의 역정을 그린 영화다. 남위 82도 08분 동경
54도 58분에 위치한 해발 3,700m, 얼음 두께 300m, 지구 최저 기온 80도의 남극 도달 불능점은 6명의 대원들이 각자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정복해야 할 ‘점’이다. 그러나 인간을 거부하는 마지막 미지의 땅 남극은 그들을 쉽게 반기지 않는다. 행군 21일째, 80년 전
남극에서 죽은 영국 탐험대의 일기 한 권이 발견되고 그 순간부터 탐험대에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한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쳤던 탐험대는 봄날
얼음장처럼 갈라져 나가고 6개월간 낮만 계속되던 남극은 이제 곧 암흑 천지로 변할 태세다. 이상한 기운으로 탐험대를 밀어내는 남극. 도달
불능점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자연과 그에 맞서는 용맹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모두에게 환영받는 소재였다. 험준한 산과 깊은
바다, 높은 하늘과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 어느 순간보다 멋져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희열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은 보기 드물었다. 한국 최초의 탐험 영화를 표방하는 <남극일기>는 <버티컬 리미트> <퍼펙트 스톰>
<스페이스 카우보이> 같이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을 찬양하는 어드벤처 휴먼 드라마는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극한의 상황에 몰린
지극히 이기적이고 지극히 나약하며, 동시에 괴력을 발휘할 만큼 강해지기도 하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을 탐험한다. 캄캄한 밤 숲길을 지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 보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숱한 공포를 스스로 불러온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기념품>(1997), <소년기>(1998), <베이비>(1999) 등 독특한 뉘앙스의 단편영화를 해마다
내놓은 임필성 감독은 단숨에 충무로 행을 따낸 ‘루키’였다. 장편영화 경험이 전혀 없는 그였지만 굴지의 모 제작사가 데뷔를 약속했고 단편 시절
공포와 스릴러 장르에 재능을 보인 그는 공포 스릴러 <엘리베이터>를 연출할 예정이었다. <엘리베이터>가 감독과 제작사 간의
의견 차이로 도중 하차한 이후에도 그는 같은 영화사에서 <남극일기>로 데뷔 준비를 했다.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탐험 영화를 찍는다는 게
모험이긴 했지만 당시 충무로에 불던 호러 열풍은 이 낯선 영화를 상업적으로 지지할 안전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남극일기>는
<가위>나 <해변으로 가다>처럼 트렌드에 부합하는 공포영화가 아니었다. 인물이라고는 6명의 탐험 대원이 고작이지. 영화
내내 낮과 설원이 계속되는 단조로운 배경이지,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공포도 아니지, 게다가 큰 예산을 수반하는 해외 로케이션은 위험천만이어서
6고까지 쓴 시나리오는 상업적으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다른 제작사로 넘어가게 된다. 그사이 충무로에는 블록버스터 열풍이 불다 꺼졌다.
<아 유 레디?>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실패한 이후 돈줄은 말라붙었고 족히 50억 원은 들어갈
<남극일기>에 돈을 댈 투자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2002년 말 송강호라는 충무로 최고의 ‘블루칩’이 시나리오를 읽은 지 10시간
만에 출연을 결정했으나 경색된 투자는 풀리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8고까지 나오고 6명의 프로듀서가 바뀐 끝에 2003년 <남극일기>는
세번째 제작사 싸이더스와 일곱번째 프로듀서 임희철을 만나게 된다.
“시나리오는 괜찮은데 지금은 진짜 힘들어. 코미디 코드가 없으면 투자가 안 되는데 이 영화 별로 웃기지도 않잖아.” 당시 <지구를
지켜라!>로 존폐 위기를 맞던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남극일기>를 들고 찾아온 임필성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희망을 준 것도 차대표였다. 임필성 감독은 "분명 1년 안에 상황이 바뀔 거다, 지금은 코미디가 너무 많아 오히려 이런 영화가
경쟁력이 있다. <살인의 추억>이 잘되면 트렌드가 변할 거다. 차승재 대표가 그랬는데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고 말한다.
<살인의 추억>을 필두로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올드보이> 같이 트렌드에서 벗어난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남극일기>는 드디어 투자자를 구했고 2004년 5월 25일 양수리 서울종합촬영소에서 대망의 크랭크인을 했다. 그
얼마 후인 6월 14일 경, 40여 명의 배우, 스탭들과 함께 <남극일기>는 적도를 가로질러 뉴질랜드에 도착한다.
브리짓, 당신은 엘프!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01년 5월 뉴질랜드 웰링턴 공항에 도착한 임필성 감독은 오염되지 않은 대륙의 맑은 공기를 들이 마셨다. 이듬
해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로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수상한 웨타스튜디오의 리처드 테일러가 개봉 전 이 영화의 자료를 보여 주며
열의를 보였다. 임필성 감독은 맑은 공기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뉴질랜드 영화인의 환대에 감명을 받았다. 그 후로 다섯 번, 임감독은 각기 다른
프로듀서와 뉴질랜드를 찾았다. 뉴질랜드는 연간 5편의 자국 영화를 만들 정도로 시장이 좁아서 <남극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매번 다른 프로듀서와 동행하는 <남극일기>는 점차 의심을 사기 시작했다. 인간적으로는 친분이 쌓여갔지만 투자 문제로 제작 일정이
밀리자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그 사이 환율은 가뜩이나 높은 제작비를 10% 이상 올려 놓았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막대한
성공 이후 이곳에는 세계 각국의 유수한 프로젝트들이 물밀 듯 밀려 들었다.
지난 1월 임희철 프로듀서가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감독이 왜 그렇게 이곳을 고집했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로만 상상하던
그림이 머릿속에 영화처럼 펼쳐졌다. 함께 헌팅을 다니면서 후발 프로듀서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도 금세 사라졌다. 그는 뉴질랜드 라인 프로듀서
브리짓 버크를 만난 것을 이 영화 최대의 행운으로 생각한다.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들> 프로듀서였으며 <프라이트너>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의 프로덕션 매니저로 일한 ‘원조 피터 잭슨 사단’ 브리짓 버크는 29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영화와 방송
일을 해온 베테랑이었다. <남극일기>팀에게 버크는 <반지의 제왕>의 요정 엘프와도 같은 존재였다.
“해외 로케이션이라는 게 시스템적으로 많은 갈등을 빚게 마련이다. 시간에 대한 규약은 이해해도 인원 배치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많았다.
왜 세트를 짓는데 안전 요원과 간호사가 상시 대기해야 하나. 그게 다 돈인데. 하지만, 브리짓이 자기네 스탭들 많이 써야 한다고 우겼으면 문제가
심각했을 텐데 한국 시스템에 수긍을 많이 해줬다. 할리우드 스탭들이 와서 전부 할리우드식으로 맞추려는 방식에 불만이 있던 브리짓이 입장을 바꿔
한국 쪽에 많이 맞춰줬다.” 임희철 프로듀서는 브리짓 버크가 <남극일기>에 동참하면서 현지의 유능한 스탭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으며 그중에는 <올드보이> 제작이나 한국 CF에 참여했던 인력도 있어 스탭들 사이의 분위기도 좋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영화인들이 금연 열풍과는 무관한 골초들이란 걸 알아챈 브리짓 버크는 “한국인들은 담배를 못 피우면 더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식당에 흡연 구역을 따로 만들 예정이다. 하지만 촬영이 끝날 때쯤엔 모두 금연에 성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롤러코스터가 아닌 동반 체험형 영화
연신 담배를 입에 무는 송강호가 제작 고사 뒤풀이에서 지난 얘기를 몇 자락 들려줬다. “그동안 감독이 마음고생이 심했겠지만 영화가 때를
만나느라고 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은 <남극일기>가 뉴질랜드에서 찍고 하니까 소재나 볼거리 면에서만 관심을 가지는데
이 영화는 연극으로 치면 관객과 무대 사이의 제4의 벽을 없애는 체험형 영화다. 관객들이 영화 속에 들어오면 밀도 높은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만들어낼 연기의 긴장이 중요하다.” 송강호보다는 담배를 덜 피우는 유지태가 담배를 꺼내며 한마디 거든다. “송강호 선배뿐 아니라
정말 훌륭한 연극 배우들과 공연을 하게 돼서 기대가 많이 된다.” <리베라 메>에서도 비슷한 앙상블 연기를 해본 적이 있지 않냐고
묻자 “그때는 잘 안 됐지만 이번에는 팀워크가 다르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각종 기록을 보유한 탐험 대장 최도형 역의 송강호와 스위스의 샤모니
등반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김민재를 연기할 유지태가 생사고락을 함께할 탐험 대원으로 호흡을 맞출 배우들은 박희순(이영민),
김경익(양근찬), 윤제문(김성훈), 최덕문(서재경), 그리고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유진 역으로 특별 출연할 강혜정이다.
<올드보이> 때 이미 뉴질랜드 곳곳을 흡연 구역으로 만들었다는 정정훈 촬영감독과 44일만에 남극점에 도달, 세계 최단 기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탐험가 박영석 팀장도 <남극일기>를 함께 쓰는 믿음직한 스탭들이다. 탐험 슈퍼바이저라는 크레딧으로 이 영화에
참여한 박영석 팀장은 지난겨울 배우들과 두 차례 워크숍을 하며 눈밭에서 걷는 법은 물론이고 탐험가들이 밥 먹고 빨래하는 방법까지 숙지를 시켰다.
아웃도어 캐주얼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이사이기도 한 박영석 팀장은 영화에 등장하는 일체의 의류, 액세서리, 장비 등을 협찬하기로 해 프로듀서는
입이 귀에 걸렸다.
데뷔작을 찍는 임필성 감독에게 시간은 잔인했지만 인복은 과분하다. 거짓말 같이 모든 배우와 스탭들이 한번에 캐스팅을 수락했다고 감독은
말한다. 시나리오가 투자자의 손을 도는 사이 이 시나리오를 받은 영화인들은 놓지를 않았다. 그중 압권은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링 2>의 음악감독 가와이 겐지다. “아름다운 음악보다 음향과 음악 사이에 있는 추상적인 음악을 원해서
가와이 겐지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정말 같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임필성 감독은 가와이
겐지에게 “남극의 목소리를 표현해 달라”고 했다.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내년 초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목소리가 만들어질
사이 부지런히 찍어야 할 그림이 너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