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떠나라>는 장진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유머
감각을 여실히 보여 준다. 미스터리 스릴러인 이 영화에서도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그의 유머 감각은 여전하다. 많은 등장 인물이 나와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고 살인사건은 미궁에 빠진 가운데 엉뚱한 방향에서 해결책이 풀린다. 그리고 마지막 대반전이 일어난다. 여러 장르의 매력을
교묘하게 섞은 이 영화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장진의 재능은 다시 확인된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특이한 행보를 걷는 그와 처음으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김영진 어디선가 보니까 <박수칠 때 떠나라>가 스스로도 정말 재밌다고 썼던데.
장진 그건 쇼맨십이다. 실은 불안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를 무대에 올렸을 때 드라마가 너무 약했다. 플롯이
보이지 않고 곁가지 에피소드들이 돌출해서 관객이 거기 재미를 느끼는 사이 굵은 플롯을 따라잡지 못했다. 영화도 혹시 그렇게 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많았다.
김영진 영화와 연극은 얼마나 닮았나.
장진 연극과는 줄거리만 비슷하다. 담고 있는 버라이어티한 재미가 연극, 영화는 서로 다르다. 연극은 흥행작이라고는 하지만
2주밖에 공연 안 했다. 얼마나 사람들이 봤겠나.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김영진 당신 영화사에서 제작한 <웰컴 투 동막골>은 박광현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고 당신이 직접 연출하는
<박수칠 때 떠나라>는 다른 영화사에서 제작했다. 왜 그랬는가?
장진 <웰컴 두 동막골>이 원체 덩치가 큰 영화이다 보니 회사가 흔들렸다. 우리 영화사 ‘필름있수다’는 PD 두
사람에 관리 사원 한 명,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이 있는 회사인데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또, <아는여자> 때 제작과 연출을 겸해
내가 너무 고생을 했다. 바보 같이 역할 분배를 하지 않은 채로 제작에 들어가 온갖 결재 서류 사인해가며 영화를 찍으니 미칠 것 같았다.
김영진 근데, <아는여자>가 당신 영화 중에 제일 걸작 아닌가?
장진 <박수칠 때 떠나라>는 그보다 못한가?
김영진 스토리텔러 장진의 재능이 보이지만 촬영은 <아는여자>만 못하다.
장진 우리가 인정하는 실수다. 세트에서 찍는데 조명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카메라 렌즈를 개방으로 놓고 찍었는데
포커스 조절에 문제가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촬영 책임이지만 역추적해 보면 원인은 복합적이다. 이 영화로 입봉한 촬영감독과 다시 또
작업한다. 왜? 그는 죽을 때까지 문신처럼 이번 실수를 몸에 붙이고 있을 테니까.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다.
김영진 첫 장면은 압권이다. 한 여자가 죽은 호텔 방에서 카메라가 공중으로 치솟으며 빠져나와 호텔 전체를 보여 주고 다시
거리로 하강한다.
장진 무지하게 고생했다. 그 장면을 담으려고. 촬영 초반에 찍어둔 것인데 기술적으로 복잡해서 거의 시사 직전에야 마무리됐다.
한 고귀해 보이는 여자가 죽은 모습을 담는 카메라가 서서히 빠지면 그 주변에는 혼란, 복잡함, 소란, 외면, 무관심 등으로 점층되는 장면이다.
<도그빌>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그건 카메라 서른 몇 대를 동원해 찍은 다음, 자유롭게 섞은 것이다. 우리 여건은 그렇게 안
되니까 카메라 한 대로 여러 각도에서 찍은 다음 나중에 일일이 맞춘 것이다.
괴이한 유머 감각
장진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화면 연결 감각은 특이하다. 그의 영화는 매우 속도감 있게 진행될 듯하지만 실은 한
호흡씩 느리게 전개된다. 약간 어긋나는 그 호흡 속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유머 감각이 만들어진다. 화면 구성 방식이 닮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의 반응 화면을 먼저 보여 준 후에 웃기는 상황을 이어 붙이는 식의 유머 감각이 그의 영화에는
있다. 게다가 중심 플롯만큼이나 다양한 서브 플롯을 깔아놓고 태연하게 삼천포로 빠진 다음, 다시 중심 플롯으로 돌아오는 그의 이야기 구성 방식도
영화에 특이한 리듬을 부여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서는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구성 속에서도 그 호흡이
관철된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김영진 당신 영화는 항상 호흡이 특이하다. 대사는 많은데 말을 느리게 하고 화면 마다 1, 2초가량 컷이 늦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한 호흡에 쭉 읽히는 속도감이 있는데, 대사 리듬이 워낙 좋으니까, 헌데 영화는 다르다. 단역 한 사람이 화면에
등장해도 꼭 책임을 지고 그가 뭔가 하나라도 관객을 웃겨줘야 화면에서 퇴장한다.
장진 하하하. 미치겠다. 오늘 이거 임자 제대로 만났네....
김영진 상영 시간에 부담이 없나.
장진 상영 시간은 크게 걱정이 되지 않는다. 내 시나리오는 보통 신을 80개 이하로 구성한다. <아는여자>도 80신
조금 넘었다. <박수칠 때 떠나라>도 80신이 채 되지 않는다. 난 콘티 작업을 하지 않아서 컷의 흐름을 미리 계산하지 않는다.
대신, 리허설을 통해서 비주얼 스토리보드를 구성해놓는다. 그런 다음 현장에서 컷에 관한 한 본능적으로 내 호흡에 따른다. 내 호흡 자체가 그런
것 같다. 화면과 화면이 슬쩍 한 템포 쉬고 넘어가는 점이 있다. 알게 모르게 그런 호흡에 익숙하고 그게 없으면 스스로 쩔쩔맨다.
김영진 <기막힌 사내들>은 웃겼지만 좀 어색했고 <간첩 리철진> 때는 서서히 익숙해졌고 <킬러들의
수다>에선 완전히 익숙해졌고 <아는여자>에선 그 호흡에 물이 올랐다고 느꼈는데 이번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는 또
다르다.
장진 이 영화가 미스터리 구성을 취해서 그렇다. 등장 인물 각자가 작은 대사 하나를 쳐도 미스터리의 알레고리를 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대사도 그냥 흘러가는 대사가 아니고 대사와 대사 사이의 행간에 작게라도 뭔가 암시가 깔린다. 소담하게 로맨틱 코미디로 가는
<아는여자>와는 또 다르다. 그래서 화면과 화면의 연결이 서로 부딪친다는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김영진 영화가 굉장히 시끌벅쩍하게 진행되는데 그 이면에는 고요함이 감도는 분위기다. 등장 인물의 말은 되게 많은데 조용한
느낌을 준다. 그게 당신의 코미디 본능이다 이건가.
장진 내가 그걸 의도하거나 정교하게 계산한 건 아니다. 매사에 계산을 못하는 스타일이다.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
호흡이.
‘힘들어요? 밥이나 먹어요.’
이번 여름 시즌에 장진이 관여한 영화 두 편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다. <웰컴 투 동막골>은
장진의 원작 희곡을 박광현이 연출한 것으로, 이 영화에서 장진은 제작을 맡았다. <박수칠 때 떠나라> 역시 동명의 희곡을 영화화한
것이며 장진이 직접 연출을 맡았다. 그는 동시에 두 기획을 진행하면서 하나는 자신의 영화사에서 제작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영화사에서 연출을
맡았다. 겉보기에 장진의 생산성은 무척 왕성하다. 정작 장진은 영화 산업의 복판에서 느끼는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의 야심은 창대했었으나
이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영화사 ‘필름있수다’를 통해 좀 더 다른 구도의 밑그림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꽤
신중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행착오를 통해 단련되는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김영진 시나리오는 술술 써지는 스타일인가?
장진 <박수칠 때 떠나라>는 2주 걸려 썼다. 그 전에 머릿속에 워밍업하는 시간, 이미지를 잡는 시간은 오래
걸린다. 그것까지 합하면 <박수칠 때 떠나라>는 1년 걸렸다. 곧 다음 작품에 들어갈 텐데 이건 시나리오 구상부터 쓰기까지 3년
걸렸다. 머릿속에서 아이디어를 굴리는 시간이 많다. <아는여자>도 마찬가지다.
김영진 <웰컴 투 동막골>은 왜 본인이 연출을 하지 않았나?
장진 연극을 영화로 할 때, 아 이거 영화로 하면 좋겠다, 라는 욕심도 물론 있을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소박한 맛도 있지만 전쟁의 횡포, 난폭함 속에 내가 가보고 싶었던 파라다이스는 전쟁의 무시무시한 크기가 필요한 공간이었다. 난 그 공간을
스크린에 옮길 자신이 없다. 난 자체 평가를 수시로 하는 인간이다. 난 그 스케일을 못 만든다. 영화감독으로서 조금씩 와이드 화면의 느낌을
알아가고 있지만.... 아직 롱 샷으로 크게 펼치는 그런 스케일은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미술감독에게 이 일을 전적으로 맡길
부분도 아니다. 이 이야기를 친근하게 봐줄 수 있고 보듬을 수 있는 시선을 지닌 감독이 있어야 한다. 내 주변에 있던 박광현이라는 감독은 너무
적임자였다. 요즘 이 영화를 보면 내가 왜 <웰컴 투 동막골>을 안 만들었는지 이해가 갈 거다, 라고 말하고 다닌다.
김영진 좋은 제작자였나?
장진 솔직히 이 영화 때문에 회사가 많이 힘들어졌다. 난 좋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고 스타가 없으니까
투자받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제작에 들어갈 수 있게 됐지만 제작비가 8억 원이 초과됐다. 군소 영화사에서 제작비를 8억 원이 초과 지출되면 정말
힘들다. 영화의 수익 지분이 낮아지고 다음 작품의 기획비를 모자라는 제작비에 부어넣는다.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박광현 감독에게 많이 줬지만 그는
좋은 감독이다.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제작사의 스트레스를 다 감당했고 그런 와중에 작품의 질을 포기하지 않았다. 촬영지가 있는 강원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이은하 PD에게 늘 그랬다. 박광현이 잘 하고 있다, 그는 실패할 가능성에 주눅 들지 않았다. 영화 제작의 여러 과정에서
기분이 되게 좋았을 때가 많다. 작품도 어느 정도 걸출하게 나왔다. 지금 얼마나 많은 데서 박광현 감독에게 입질이 있겠나. 근데 다음 작품 역시
‘필름있수다’에서 하고 싶다고, 장진 감독에게 전해달라고 이은하 PD에게 조심스럽게 말해놓은 거다. 나야 그럼 고마운 거 아닌가. 우리가
박광현과 만나 작업했던 진심을 알아줘서 너무 고맙다. 최소한 내가 만난 제작자들은 다 그랬다. 먼저 영화사가 쓰러지더라도 내가 책임진다는 태도로
현진의 이순열 사장이나 시네월드의 이준익 사장이 감독인 나를 보호해줬다. 나도 그 선배들만큼 의당 제작자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박광현 감독이
그 진심을 알아주니 고맙다. 우린 또, 상처를 받으면 뼈가 부러지고 피가 나고 장 파열 되고 이러진 않지만 오래 가니까 서로 믿으면서 웃고 가는
이 상황이 행복하다.
김영진 한때 장진 사단이라는 말도 언론에서 나오고 했는데 굉장히 큰 그림을 그리고 제작과 연출을 겸하고 있다는 추측을 했었다.
장진 지금 내가 제작한 영화와 연출한 영화가 1주일 간격으로 극장에 걸리니까 모양새가 좀 이상하게 됐는데, <웰컴 투
동막골>은 사실 5, 6월에 개봉할 예정이었는데 작업이 늦어지는 바람에 지금 개봉하게 됐다. 내가 한 역할은 양 배급사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같은 날 개봉하지 않게 애쓴 것 밖에 없다. 그리고, 난 거창한 욕심이 없다. ‘장진 사단’이란 말은 배우들에게 결례가 되는 표현이다.
나는 그저 계속 새로운 배우를 발굴할 욕심이 있을 뿐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도 주인공 주변의 동료 검사들 역에 신인배우들을
썼다. 이번 영화를 위해 함께 단편영화와 연극 작업을 한 동료들이다. 그들도 자기 역할에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위치가 되면 정재영처럼 스스로
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내 팔짱을 껴주지 않더라도 지금 같은 작업 방식이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스스로 한다.
<약속>이란 영화를 보면서 정진영이란 배우가 상업 영화에서 저렇게 통할 수 있구나, 라는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던가. 이런 사례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소수의 스타배우들에게만 의존해서 영화 산업을 끌고 갈 수는 없다. 누가 내 작품에 들어오면 또 장진 사단이란
말을 쓸지도 모르지만 난 그들을 믿고 일할 거다. 신하균과 정재영이 내 영화를 통해 입지를 다졌지만 그들과의 의리는 내가 힘들 때 전화를 해서
"힘들어요? 밥이나 먹어요"라고 말해주는 거다. 내 소망은 딱 그 정도다. 규모를 키울 계획은 없다.
‘필름있수다’의 앞길
장진이 구상했던 영화인의 길은 소박한 것이다. 그는 여하튼 영화 산업의 구조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크리에이티브를 훼손당하지 않고, 나아가 동료나 선후배들의 재능을 모을 수 있는 통로를 구상했다. 본인은 그걸 별것 아닌 소망으로 치부하지만 실은
무모할 정도의 욕심이기도 하다. <킬러들의 수다> 이후 그가 장편영화 연출을 좀 오래 쉰 배경에는 제작자로서의 장진의 포부와 좌절의
역사가 있다. 그가 제작한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흥행 실패 이후 그는 다시 출발선상에 섰다.
김영진 앞으로 ‘필름있수다’에선 그럼 어떤 역할인가.
장진 웬만하면 나는 뒤쪽으로 빠지려고 한다. 다른 좋은 감독들이 내 상상과 작업이 보호받는 느낌을 받게 되는 프로덕션이라면
‘필름있수다’ 제작사의 특징은 그렇게 보여져야 할 것 같다. 내년 우리 영화사의 라인업에는 좋은 감독, 시나리오가 있다.
김영진 거기에 장진 감독의 시나리오는 없는가.
장진 없다. 한 작품 쓸 때마다 명이 단축되는 것 같다. 너무 힘들다. 기를 쓰고 해봐야 1년에 한 편 나온다. 단편은 편하게
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 그러나 장편은 갈수록 힘들다. 시장 한복판에 있다 보니까 나 스스로 치이는 것 같다. 쓸 때부터 아,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 큰 제작비로 가면 안 되는데, 라는 고민부터 들고. 아무리 시나리오가 재료 문학이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에는 순수 문학이다. 그
문학성이 제작자 입장에서 변질돼가는 것을 볼 때 내가 갖고 있는 작가로서의 위치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영진 ‘필름있수다’ 내부에선 프로듀서를 키우지 않나?
장진 프로듀서가 당연히 있다. 프로듀서가 학습을 통해서 되는 건 아니다. 현장 매뉴얼을 자기가 갖고 있어야 하고. 어차피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함께 일하는 두 프로듀서는 그 점에서 훌륭하게 경험을 키워왔다. <박수칠 때 떠나라>의 김운호 PD,
<웰컴 투 동막골>의 이은하 PD는 거의 맨 땅에서 2, 3년을 매달려 모든 걸 거의 다 했다. 이 두 사람만 있어도 ‘필름있수다’는
잘될 것 같다.
김영진 당신은 앞으로 자주 영화 만들 건가.
장진 그렇다. 영화만 한다. 지금 연극 공연을 하나 하는데 이건 어쩔 수 없이 서울예대 동문으로서 백주년 기념 행사 차원에서
하는 거다. 이 일이 끝나면 당분간 영화만 할 거다.
김영진 ‘필름있수다’는 원래 연극과 영화를 병행하는 것 아니었나?
장진 내가 맨 처음 생각한 것은 멀티프로덕션이었다. 자유롭게 연극, 영화, 텔레비전을 오가며 제작하고 매니지먼트까지 할
구상이었다. 회사를 만들고 나서 처음에 제작한 영화가 옴니버스인 <묻지마 패밀리>였다. 신인감독들이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만든 작품이었다. 그 뒤로 연극, 모바일 영화, 단편들을 제작했다. 내가 영화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트레이닝은 아주 많이
해봤다.
김영진 역시 야심이 있었군.
장진 그렇지만 우리가 제작한 <화성으로 간 사나이>가 흥행 실패하면서 많이 힘들었다. 그때 야심이란 것은 결국
그거였다. 제작자는 한 영화가 기획되고 제작되는 과정에서 자기 영혼을 담는 사람인데 이 시장의 논리가 영화가 돈을 벌면 흥행 지분 40%를
줄게, 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영화에 대한 모든 권한이 말소된다는 현실이 모든 상업 영화 시장을 지배해버리면 프로덕션 마인드는 어떻게 되겠는가,
라는 것이다. 정말 제작사는 외주 프로덕션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도박 논리만 남는다. 투자사에서 돈받으니까 영화사는 별로 손해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무실 경상비만 있으면 되니까. 두세 편 망하더라도 네 번째 영화가 흥하면 또 확 일어선다. 이건 도박이다. 이 마인드로 가면
카지노 배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난 규모가 작은 영화도 만들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0억, 20억짜리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되고
프로덕션에서 여기에 적어도 반 정도라도 자기 자본을 투여해야 영화에 대한 권리도 당연히 제작사의 권리로 가져올 수 있다고 봤다. 외톨이가
되더라도 ‘필름있수다’는 이런 제작 형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역시 군소 영화사는 한 작품 깨지니까 휘청댄다. 우리 같이 작은 영화사에서
현금 6억 원 이상 손해 보니까 유지가 힘들다. 좋은 해결책은 아예 ‘필름있수다’ 법인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근데 지금까지 버텨왔다. 돈을
억지로 만들어 회사에 박으면서 말이다. <화성에 간 사나이>의 실패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내가 야심 찼던 것은 사업을
확장시키고 이런 것은 아니고, 소박하게 꿈을 꾸었을 뿐이다. 메이저가 장악하고 있는 지금 영화 시장의 구도는, 밑에서 진정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다 변절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는 3, 4년 후가 아찔하다. 그때 영화사를 차린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까 끔찍하다.
김영진 그게 대단한 야심이다. 자본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장진 지금 영화판의 투자자들은 사실 이해를 못한다. 내가 다 투자를 했는데 왜 파이를 저들과 나누느냐. 저들은 리스크가
없는데. 영화사 운영 경비, 기획비까지 던져주는데 영화가 돈을 벌면 절반에 가까운 돈을 가져가느냐는 논리를 이해 못한다. 나는 그럼 이렇게
답한다. 대신 영화의 주인은 여러분이 되지 않습니까. 내 모든 것을 담아 만든 영화인데 여러분이 가져가지 않습니까. 내가 가고 싶은 영화제도 내
마음대로 못하지 않습니까, 라고. 이 구도는 누군가가 나서서 바꿔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쓴 맛을 본다. 그래서 나라도
가끔 나서서 드러눕는 것이다.
김영진 드러눕다니?
장진 이를테면 <킬러들의 수다>에서 정재영을 네 주인공 중 한 역할로 끼워 넣으려고 투자자들 앞에서 드러눕는다.
<아는여자>를 할 땐 정재영을 주연 캐스팅하려고 드러눕는다. 아직까지는 내 성향이 이런 것 같다. 부담이 된다면 내가 조절해보겠다,
20억으로 예산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자, 디저트도 있어요’
이런저런 장진 자신의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결국 영화감독 장진의 재능이다. 그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이야기 구성 능력과 유머로 희한한 영화를 찍어내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재미로 포장돼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적 야심도 감추지 않는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영화적 스타일의 영역에 장진 나름대로 일 보 전진하려 했던 흔적을 갖고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 언론의 선정적인 광기와 제도 권력의 관행이 충돌하는 가운데 조용히 버려진 개인들의 운명의 조각들이 소란스런 희극적 톤 속에서
조용히 차곡차곡 감정을 쌓아두고 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폭발하는 대반전을 꾀하고 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스토리텔러 장진이 영화
스크린에 어떤 정서를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고민과 야심을 품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김영진 여하튼 당신은 족보에 없는 영화를 만든다.
장진 난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지난해에 세 편 봤다. 대신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뉴스를 본다.
김영진 영화광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장점이다. 그게 당신 내공의 핵심이다. 근데, 영화를 좀 자주 만들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영화를 자주 찍을 것인가.
장진 1년에 한 편은 찍을 것이다.
김영진 이제 당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영화가 두 편씩이나 개봉하니 형편이 좋아지겠다.
장진 모른다.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웰컴 투 동막골>은 분위기가 좋으니까 잘될 듯한데, <박수칠 때
떠나라>가 걱정이다. <친절한 금자씨>, <웰컴 투 동막골> 등이 다 잘나가는데 내가 연출한 영화가 한국영화 상승세에
누가 될까 봐....
김영진 차승원은 관객들의 충성도가 무척 높은 배우다. 관객들은 차승원에 대해 신뢰가 있다. <박수칠 때 떠나라>에는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결국 차승원이 드라마의 축이고 또 그의 매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
장진 그전에 일해본 배우들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배우가 신현준이었다. 차승원은 더하다. 되게 민주적이고 귀가 열려 있지만 감독
보다 한 술 더 뜬다. 일단 자기 준비물이 있다. 그 사람이 다른 배우들보다 훨씬 세다는 것은 자기 준비물이 있고 자기 NG가 확실하다는 거다.
자기가 만족하지 않으면 한 번 더 찍겠다고 한다. 그 다음에 선택하세요, 라고 말한다. 감독 입장에선 너무 고맙다. 대개는 90% 이상 다시
할수록 화면이 좋아진다. 그는 자신에 대해 그렇게 체크한다. 내가 보기에 넘어가는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가서 90%를 95% 넘어가게
만들어준다.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카메라가 다가가는 클라이맥스를 찍을 때도 대단했다. 1분 이상 지속되는 화면을 찍는데 여덟 번을 다시 갔다.
그때마다 감정이 더 농밀해졌다.
김영진 신하균은 어땠나.
장진 많이 일해 봤지만 언제나 그는 뭔가 새로운 걸 품고 있는 배우다. 그걸로 감독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뭐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미안한 것은 애초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후반부에선 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거다. 많이 고민했는데 해답이 없었다.
김영진 근데 어떻게 하면 그런 식의 이야기가 나오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에피소드와 등장 인물들이 서로 맞물리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쓴다. 학교에선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데....
장진 <박수칠 때 떠나라>는 이런 경우다. 내가 여러분을 저녁 식사를 초대했다고 하자. 다양한 메뉴가 있다. 자,
메인 요리로는 찌개를 갖다 놓았다. 찌개의 냄새와 맛을 잊지 말아주세요, 라고 권하며 요리를 내면 사람들은 맛있게 먹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요리 실력이 별로네, 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본 코스 요리 식사가 다 끝났을 때 자, 디저트도 있어요, 라고 권하는 또 다른 비장의
메뉴가 나온다. 그때까지 여러 메뉴가 나왔지만 이게 맘 먹고 준비한 거다. 관객들이 마지막 장면까지 힘들게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 장면에서 약간
공포영화 느낌이 나면서 슬픈 정서가 배어나는 게 진짜 이 영화의 맛이다. 그게 통할까, 조마조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