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을 시작으로 <청연>과 <야수>, 올 겨울 한국영화 대작들이 기지개를 켠다. 세 편을 미리 만난다. 먼저 순제작비 150억 원의 <태풍>은 대작 한국영화의 흥행 계보를 잇는 모범 답안이라는 점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곽경택 감독은 ‘내가 찍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가 1.4 후퇴 때 월남하면서 많은 형제들을 북에 두고 온 실향민이었기 때문이다. <태풍>을 만들게 된 그의 무의식 속에는 남 몰래 흘리던 아버지의 눈물이 숨어 있다. 이렇게 <태풍>은 대작 액션영화라는 선 굵은 외관 안에 가슴 아픈 연민과 한반도의 비극적 현실을 보듬고 있다. <태풍>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등 지금껏 남북 문제를 다루며 당대 박스오피스 권좌에 올랐던 대작 영화 계보 안에 놓인 모범 답안이다. 곽경택 감독의 전작 <친구>(2001)에서 보듯 그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추출한 이야기로 관객과 만날 때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풍> 역시 묵직하게 다가온다.
해군 UDT 대위 강세종(이정재)은 해적 신(장동건)을 잡기 위한 작전에 투입된다. 신(Sin)이라 불리는 최명신은 미국 선박에서 군사 물품을 탈취한 인물로 미국, 일본 등 주요 강대국들의 초경계 인물이다.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탈북했던 그는 남한 정부의 입국 거절로 누나 최명주(이미연)와 단 둘이 살아남은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복수를 위해 그는 남한에 테러를 감행한다. 이를 막기 위해 강세종은 12인의 특전사와 함께 타이과 한국을 넘나들며 숨가쁘게 신을 쫓는다. 한편, 동생 신과 헤어져 러시아로 흘러들어온 최명주는 창녀로 살아가다 약물 중독으로 폐인이 돼 있다. 서로의 자취를 쫓던 두 남자는 명주의 그림자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인다.
<태풍>은 최근 몇 년간 만들어진 한국영화들 중 가장 고난스런 행군을 마쳤다. 11월 1일 부산에서 크랭크인한 <태풍>은 곧장 타이로 날아가 본격적인 로케이션 촬영을 시작했다. 방콕 중심가의 시암대학은 강세종과 신이 쫓고 쫓기는 출국심사대로 탈바꿈했고, 유명한 휴양지인 크라비 근처 섬에는 신의 본거지인 집시촌 세트가 세워졌다. 살인적인 무더위와 점점 늘어지는 로케이션 등은 8개월여로 예정된 긴 촬영 기간 초반부터 제작진에게 난관을 안겼다. 기나긴 해외 로케이션의 마지막은 러시아의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어두운 암시장을 배경으로 신과 강세종, 그리고 둘 사이의 여인 최명주가 운명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역시 문제는 규모다. 147억의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많은 순제작비 150억 원의 <태풍>은 그야말로 또 하나의 매머드급 한국영화다. 홍경표 촬영감독, 특수분장 신재호, 특수효과 정도안, CG 인사이트비주얼, 세트 청솔아트 등 <태극기 휘날리며> 인력들이 고스란히 <태풍>으로 들어왔다. 끊임없는 업그레이드를 꿈꾸는 이들에게 <태풍>은 ‘한국영화에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주겠다’는 각오로 가득 차 있다. 선박 탈취신과 두 주인공이 격돌하는 태풍호에서의 액션 장면, 그리고 부산과 러시아에서 펼쳐질 도심 추격 장면 등이 제작진이 귀띔하는 강추 장면들이다. 또한 <태풍>은 한국에서는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대규모 김블(Gimbal) 장치가 구축된 수조 세트를 선보인다. 항공기나 선박 같은 큰 규모의 세트를 상하좌우 자유로이 컨트롤할 수 있는 장치다. 넘치는 스케일만큼 <태풍>이 당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준이 될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주성철 기자
“부딪치며 터득하며 찍었다”
곽경택 감독 인터뷰
장동건과 이정재의 카리스마 대결이 기대된다.
장동건이 불이면 이정재는 얼음이다. 장동건은 해적이지만 낭만적 코드를 심어주려 했고 따르는 주변 인물들도 많다. 이정재의 경우 개인적으로 TV 드라마 <모래시계>의 재희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가짜 여권의 이름도 ‘백재희’다. 재희 이후 자신의 카리스마를 더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왜 안 하는 건지 궁금했고 <태풍>에서 그 고독한 카리스마를 살려 보려 했다.
해외 로케이션 장소들은 어떻게 정했나?
영화에 나오는 공간들을 태풍 영향권에 있는 도시로 쓰려고 했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와 한국뿐 아니라 홍콩과 일본도 생각했다. 그런데 <챔피언> 촬영 때 보니까 일본 등 대도시에서의 제작비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아무래도 물가가 싼 타이나 블라디보스토크 위주로 찍었다. 부산의 경우 <친구> 때는 작심하고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 담긴 공간들을 찾아 찍었는데, 이번엔 같은 부산이면서도 다이내믹하고 스케일을 크게 보여 줄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았다.
김블 장치 등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겠다는 야심이 크다.
김블을 수입하고 보니 8t 정도만 얹어야 지탱된다고 했다. 돈은 없는데 욕심이 나서 김블에 축 하나 더 달고 받침대를 받치면 더 크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 계산을 해서 안전 장치도 했다. 그래도 사실 김블이 돌아가면 무서웠는데 무사히 촬영을 끝냈다. 이번에 연출부들과 함께 하나하나 공부해 가면서 찍었는데 그럴수록 할리우드 기술도 해볼 만하구나, 막상 부딪치니까 되는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