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소매치기 원정을 떠났다가 다시 국내로 들어온 백장미(손예진)는 삼성파를 조직하고 세를 규합한다. 뒷골목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기계, 바람, 안테나를 모두 손에 넣은 백장미는 동대문과 명동 일대의 소매치기 세력들을 단숨에 제압하며 야심을 키운다. 서울을 모두 장악하려는 백장미는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전설적인 소매치기 강만옥(김해숙)까지 끌어들이려고 시도하지만, 강만옥은 새 삶을 살겠다며 백장미의 제안을 거부한다. 한편 광역수사대에서 조직범죄를 전담하고 있는 형사 조대영(김명민)은 상대파에 목숨을 위협받던 백장미를 구하게 되고, 얼마 뒤 연쇄 소매치기 사건 용의자를 추적하면서 백장미에게 빠져든다.
<무방비도시>는 “숨소리마저 거짓말”이라는 소매치기범들과 이들을 뒤쫓는 형사들의 대결 구도를 골조로 삼은 영화다. 조직폭력을 다룬 형사물은 지금까지 많이 쏟아져 나왔으나 소매치기를 다룬 영화는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종 은어들과 3차례의 액션으로 버무린 전반부는 꽤 빠르고 또 볼 만하다. 도시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지갑이나 돈을 직접 터는 기술자”인 기계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어 기계를 돕는” 바람과 “망을 보다 들통날 위험에 처하면 칼 등을 이용해 상해를 입히는” 안테나가 한조를 이뤄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을 유린하는 장면들은 두렵고 또 동시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눈요기에 걸맞은 영리한 트릭과 촘촘한 계산까지 곁들여졌다면 어땠을까. 전반부에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조대영과 강만옥, 강만옥과 백장미가 얽혀든 과거사를 모조리 토해놓는다. 반면 조대영이 백장미의 유혹에 빠져드는, 실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설명하지 않는다. 소매치기 엄마를 뒀다는 이유로 온갖 험한 수사를 마다지 않았고, 심지어 형사 일까지 그만두려고 했던 자존심 강한 조대영은 왜 백장미 앞에서 순순히 무장해제당하는가. 대결 구도의 한축을 포기하는 순간 영화는 기우뚱한다.
‘리얼소매치기범죄액션’이라는 카피는 그런 점에서 적절한 수식은 아니다. <무방비도시>가 애초 증명하고 싶었던 건 훔칠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부모와 자식간의 혈육지정이다. <무방비도시>의 용서받고 싶은 부모와 결국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식은 <해바라기>의 용서하는 부모와 결국엔 뉘우치고 흐느껴 우는 자식과 다르지 않다. 두 영화 모두 같은 제작사가 만든 영화인 탓도 있겠지만, <해바라기>의 다른 버전처럼 보인다. 쌍둥이파 보스로 나오는 1인2역의 김병옥을 비롯해 <해바라기>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것도 착시를 돕는다. <리베라 메> <바람의 파이터> 조감독을 거친 이상기 감독의 데뷔작.
새로운 작품을 할 때 마다 ‘재발견’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하는 배우 손예진. 그녀가 이번에는 영화 <무방비도시>에서 소매치기 조직의 리더 백장미로 돌아왔다. 손예진은 이 영화에서 기존의 밝고 귀여운 이미지와 전에 없던 팜므 파탈의 매력을 넘나드는 연기 변신에 도전한다. 잘 한 부분에서는 칭찬을 받고 싶고, 잘 못 한 부분에서는 따가운 질책을 받고 싶다고 말한 그녀는 배우는 작품과 연기로 말하고 평가는 관객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진정한 연기자였다.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 “제가 범접하기 힘든 캐릭터였어요.” 손예진은 처음 <무방비도시>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과연 이 역할을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정중하게 못한다고 거절을 했다. 하지만 다른 시나리오를 보면서 다시 읽게 된 <무방비도시> 시나리오에서 처음에 봤을 때 느끼지 못한 백장미의 이면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극중 백장미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 아픔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읽어나가면서 이 백장미라는 캐릭터는 배우가 가진 역량에 따라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이상기 감독님을 만나 백장미 캐릭터에 대해서 연출자가 가지고 있는 관점을 들어 보기로 했어요.” 그 자리에서 이상기 감독이 했던 이야기는 손예진으로 하여금 백장미 캐릭터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섹시하고 강하기만 한 팜므 파탈 역이라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감독님도 말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고 냉정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과거의 기억 등이 살아났을 때 백장미 캐릭터는 빛을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변신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도전하게 됐지요.”
백장미 역을 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 화려하지만 꾸밈이 없다. <무방비도시>의 개봉을 앞둔 영화배우 손예진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사실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되면 부담감이 크지만 하고 났을 때의 쾌감은 말로 설명 하기가 힘들어요.” 이상기 감독의 연출 데뷔작 <무방비도시>는 배우들의 변신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손예진이 서 있다. 극중 캐릭터를 자신 안으로 끌고 오면서 손예진은 알 수 없는 희열도 느꼈다.
매 신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 시나리오에 표현된 '특정화된 캐릭터'를 맡으면 무척이나 어색하게 보이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잘 어울리는 배우가 있다. 이제 더 이상 변신이 두렵지 않은 손예진은 후자 쪽의 배우다. 손예진은 이번 영화에서 억지로 백장미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시나리오에 그려진 백장미의 감정을 내 안에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장르, 어떤 캐릭터를 앞에 갖다 놓아도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그녀는 딱 자신의 연기만큼의 평가를 받고 싶다고 했다. “연기가 조금만 과장됐더라도 백장미는 무척 전형적으로 느껴졌을 거예요.”소매치기의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백장미’라는 캐릭터가 독특한 존재감을 갖는 건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공이 크다. 매 장면을 찍을 때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그녀는 시나리오 상에서만 생명력을 얻었을 것 같았던 ‘백장미’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소매치기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이기 때문에 손예진은 전문 용어에서부터 그들의 습관이나 말투까지 모두 새롭게 연구해야 했다. 정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해결해 나갔다. “평소에 담배를 피지 않아서 담배 피는 장면이 어려웠어요. 저는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하고 담배를 피는 데 입 모양이 자꾸만 이상하게 되는 거예요(웃음).”
천 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배우 - 손예진은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런 손예진에게도 연기는 할 때 마다 새로운 과제를 안겨준다. 아무리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도 카메라 앞에서 늘 자신감이 가득 찬 연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일까?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이 연기인 것 같아요.” 자신의 역량 보다 좋은 연기가 나온 날이 있다면 그 반대의 상황도 발생하길 마련이다. 그 편차를 줄이는 것이 배우의 역량이라고 손예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움을 경험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요. 하지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배우와 함께 성장하고 늙어가는 것은 팬들에게는 각별한 경험이다. 해보고 싶었던 작품을 연기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아는 손예진은 연기 욕심도 대단했다.
관객들로 하여금 기대를 갖게 만드는 배우 - 손예진이 <무방비도시>에서 연기한 백장미의 꿈은 40억짜리 요트를 사는 일이다. 나이에 비해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손예진이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꿈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만일 백장미가 그 꿈을 이루었다면 행복했을까요? 아마도 만감이 교차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 꿈은 계속 변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런 손예진이 배우로서 갖는 꿈은 관객들로 하여금 기대를 갖게 만드는 연기자가 되는 것이다. “저는 한 작품을 끝날 때마다 좀 더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 손예진은 배역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간다고 했다. 배우라는 직업은 그녀로 하여금 사람을 대하는 방법 또한 알려주었다. 인간을 탐구해야 하는 직업 중 하나인 배우라는 일이 그녀에게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혀준 것이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배우라는 직업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좀 더 편안해진 것 같고요.”
배우는 계속 진화한다 - 연기자라면 누구나 대중들 앞에서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변신을 보여준 손예진도 마찬가지다. “멜로를 찍더라도 다른 멜로, 코미디를 찍더라도 다른 코미디, 이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배우는 작품을 통해 성장해간다는 연기의 진리를 경험으로 체험한 손예진은 변신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만 해도 그래요. 3~4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저의 연기를 보면서 왜 아픈 역할만 계속해서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아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도 저는 한 살 한 살 배우로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할 수 있는 연기의 폭도 넓어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지금 할 수 없는 역할을 서른이 넘으면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고, 그렇게 배우는 계속 진화하는 것 같아요.”
<작업의 정석>은 내 연기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다 - 손예진은 ‘청순가련’을 뛰어 넘어서 자신이 배우로서 거듭날 수 있었던 작품으로 <작업의 정석>을 꼽는다. “이 작품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스스로 코미디라는 장르를 소화해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변신을 하기 위해 <작업을 정석>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어요. 시나리오가 재미있었고, ‘내가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작품을 하도록 이끌었죠. 손예진이라는 배우가 눈물만 흘리게 하는 배우인줄 알았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웃음의 감동도 줄 수 있는 배우라는 평가를 내려주셨어요. 그런 점에서 <작업의 정석>은 저라는 배우에게 폭넓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소중한 작품이에요. 앞으로 다른 역할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안겨주었고요.”
어떤 파장이 올까 궁금했다 - 한 곳만 바라보고 뛰는 배우에게 대중들은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보는 사람들에게 쾌감을 안겨주는 변신을 시도하지 않는 배우의 수명은 길 수가 없다. <작업의 정석> 이후 그녀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역할보다 배우로서 한번 해볼 만한 도전이 생기게 만드는 역할에 몸을 내던졌다. 차근차근 연기의 폭을 넓혀가고 싶다는 그녀는 아직도 해보고 싶은 역할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이제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할 보다는 내가 이 역할을 했을 때 어떤 파장이 올까 궁금해지는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이 가는 것 같아요(웃음).”
소매치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다 - 손예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캐릭터를 인물화할 때 그 사람의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간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시나리오에 설명되어 있지 않은 부분도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 배우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을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녀의 과거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백장미’라는 캐릭터에 접근해갔어요. 저는 어떤 역할이든지 인간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결코 이해되지 않는 캐릭터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무방비도시>가 소매치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영화는 절대 아니에요.”
참고모델을 따로 두지는 않았다 - 손예진은 촬영현장에서 백장미가 가진 인간적인 면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고 극중 백장미가 가진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버리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가진 두 가지의 이미지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상기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가운 대사를 던진 백장미가 뒤돌아 섰을 때 알듯 모를 듯 슬픔 등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시나리오에는 표현되지 않은 백장미의 이면이 연기를 하면서 많이 부가가 됐고요." 손예진은 백장미 역할을 하면서 따로 참고모델을 두지 않았다. 선입견을 생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손예진은 여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 연구를 충실히 하고, 팬들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배우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그녀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손예진은 좋아하는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앞으로 도전해야 할 것도, 모험해야 할 것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던 손예진은 "좋은 작품에 좋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손예진이 한 작품이라면 믿어주고 찾아주는 관객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할 거라고 말한 그녀가 다음 작품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