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경성의 랜드마크를 보여주겠다’던 <모던보이> 감독 정지우의 호언장담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예전의 경성의 랜드마크 외에 <모던보이>가 보여줄 것이 또 무엇인가에 있었다.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스펙터클의 정체에 대해 정지우와 얘기를 나눴다.
진즉에 완성됐다는 소문이 들렸으나 후반작업이 기약 없이 늘어나며 차일피일 개봉을 미룬 <모던보이>는 정지우의 세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베일에 싸여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영화가 곧잘 그렇듯이 <모던보이>도 여러 소문에 시달렸다. 1930년대의 경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이 대작의 운명은 예술적으로 야심만만한 감독 정지우의 개과천선 여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사랑니>는 굉장한 시각적 흥분을 주는 연출에도 불구하고 인과론적인 설명을 기대한 관객의 심리를 정면으로 저버렸기 때문에 흥행의 저주를 받았다. 그런 정지우가 대작 사극을 찍는다고 하니까 이번에도 또 그가 ‘예술’을 했을지, 아니면 데뷔작 <해피엔드>처럼 더 대중적인 화술로 돌아갔을지 영화계 내부에선 궁금해했다. 이분법적 재단은 잔인한 것이지만 영화업계에선 그런 보이지 않는 폭력이 용인된다. 주홍글씨의 낙인이 어이없으면서도 끈질기게 효력을 발휘하는 곳이 영화계다.
어쨌거나 영화를 보기 전부터 정지우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사랑니>에 대해 나는 별다른 비평적 언사를 보태주지 못했다. 개봉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느 계간지에서 뽑은 올해의 영화 목록에 <사랑니>를 올리면서 길지 않은 평을 썼을 뿐이다. 이 재능 있는 감독은 지나치게 신중한 행보를 보였고 <해피엔드> 이후 6년 만에 찍은 두 번째 영화로 비평적 명예와 흥행적 불명예를 동시에 얻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새 영화를 찍었는지 궁금했다.
물론 그는 한결같은 사람이다. 몇 년 전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며칠간 지근거리에서 오랜만에 가깝게 시간을 보냈을 때 들었던 생각도 이 사람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겸손하고 성실하며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서 흔히 느끼기 쉬운 지루함이 없다. 국정교과서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인품이 훌륭하다고 인정하게 되는 드문 사람이다. 더군다나 속에 뭐가 들었는지 조금 궁금하게 만드는 예술가 기질도 있다. 오랜 시간 영화계에서 버티며 단련한 장인 기질도 있다. 그가 불과 세 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삼청동의 호젓한 카페에서 정지우는 나를 보자마자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 뭐 손수 이렇게 나오기까지… 으하하하.” 카페 2층에선 배우 김혜수 씨와 박해일 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젊은 평론가와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는 그를 보며 나른하게 앉아 있는데 정지우와 함께 살고 있는 일촌 관계의 여인이자 그의 영화의 PD인 곽신애 씨가 자리에 찾아와 알은체를 한다. 영화월간지 키노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그녀와 잠시 과거의 에피소드를 주워 담으며 우리가 벌써 나이를 먹은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 전, 단편영화를 만들던 청년 정지우가 어느 술자리에서 모 잡지의 여기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얘길 들은 생각이 나서 속으로 웃었다. 그들은 얼마 후 커밍아웃했고 결혼으로 골인했으며 십수 년이 흐른 지금 현장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됐다.
마침내 정지우와 마주 앉아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기보다는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재밌는 말을 해주기만을 기다리는 처지 비슷하게 되었다. 약을 올리고 싶어졌다.
“왜 이렇게 개봉이 늦어진 건가? 소문에 따르면 강우석 감독이 편집을 다 했다고 하던데.” 정지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서 강하게 부정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서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눴다. 강우석 감독은 편집에 도가 튼 사람이다. 제작자로서 그가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대중의 눈높이에 선 그의 감각을 존경한다. 강우석 감독도 같은 연출자 입장에서 나를 존중한다. 그런 사이로 기탄없이 의견을 나누고 조율했을 뿐이다.”
“근데 왜 그런 소문이 났을까? 충무로에선 원래 악소문이 많이 돌긴 하지만…”
“개봉이 자꾸 늦어지니까 감수해야겠지. 몇 차례 연기됐는데 결과적으로 잘됐다. 미련이 없다. 할 만큼 했으니까.”
“30년대 경성 묘사는 호언장담할 만하던데. 놀라웠다.”
“으하하하. 고맙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잠시 뜸을 들이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다시 정지우의 미소 띤 얼굴이 굳어진다. “카메라는 왜 그렇게 들고 찍었나? 격정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나긴 한데 혼란스럽기도 하고…”
“난 배우들을 억압하고 싶지 않은 감독이다. 그들의 동선과 감정 표현에 카메라가 방해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배우들의 동선에 제약을 두면 그들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그들을 따라다니는 입장에 카메라를 두고 싶었다. 뭐, 나는 문제가 없었다고 보는데…”
“영화가 초반에 리듬이 처진다. 주인공 이해명이 경성의 모던보이로서 즐기는 생활을 몽환적으로 보여주다가 클럽에서 후에 조난실로 밝혀지는 로라를 만나고 정체불명의 그녀로 인해 파란만장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은 전형적인 필름누아르처럼 전개된다. 거기 이미 코미디가 있는데 누아르영화 호흡과 좀 안 맞는다. 중반에 이르러 다시 조난실과 만난 이해명이 분노를 터뜨리며 싸우는 대목부터 영화의 극적 곡선이 선명해진다. 거기서부턴 감정이 고조된 채로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부턴 코미디 호흡도 살아난다.”
“이해명과 조난실이 숲 속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은 희극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거의 섹스나 마찬가지의 고밀도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거기서 그들 감정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로 그들의 사랑 묘사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거기까지 도달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난 그리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 보는데…”
“내가 아무리 딱딱하게 얘기하더라도 글은 따뜻하게 쓸 거다. 그러니까 너무 정색하지 마시라.”
“으하하하… 아니 내가 언제 정색을 했다고… 으하하하.”
“그리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 흠, 영화가 몽환적인 만큼 혼란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만큼 슬프다. 그런데도 후반부에 이르러 감정이 고조되는 건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찌질할 수밖에 없는 모던보이 캐릭터 이해명을 연기한 박해일의 연기 톤이 독특했다. 김혜수의 절실한 표정들도 좋았고.”
“난 배우들에게 의존하는 감독이다. 머리 나쁜 배우와 작업하면 살의를 느낄 것 같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좋은 배우들과 원 없이 일했다. 이번 영화도 그랬다. 너무들 예리하다.”
“배우들과는 무슨 얘길 했나? 촬영 전에.”
“박해일의 이해명은 ‘거짓말하지 않는 소년’ 같은 사람이다. 친일파 아버지 덕에 모던하게 잘사는 이해명에게 무슨 고통이나 대단한 결핍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주변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는 면이 없지는 않았겠지. 그것도 그리 심각하진 않았을 거다. 내가 알 수 있는 그 인물에 관한 가장 확실한 면모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조난실과의 사랑에서도 끝내 관철되는 면모일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그는 자기감정을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했다.”
“김혜수의 조난실은 어땠나?”
“이 영화는 결국 조난실의 성장 스토리다. 이해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지만 조난실은 변한다. 이해명과의 관계 속에서. 그 추이를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혜수 씨는 배우 생활을 오래 견고하게 해왔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을 맡은 걸 봤는데 성숙한 그늘도 있다. 자기관리를 잘해온 거다. 나이를 먹은 만큼 성숙한 거고. 조난실의 절실한 감정을 연기할 때 미숙하지 않을 거라고 봤고 그녀 스스로 준비를 많이 했다. 난 현장에서 그저 지켜주기만 하면 됐던 거다.”
우리의 대화가 덕담과 공감으로 흐르자 재미가 없어졌다. 현장에선 모두 최선을 다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우리가 친할 이유는 없다. 모두 능력 있는 사람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의 완성도다. <모던보이>는 정지우 감독 본인의 해명이야 어떻든 대작영화로서 아슬아슬하게 스토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불안한 영화지만 동시에 대작영화답게 볼거리가 굉장하고 클라이맥스에 분출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굉장한 영화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1936년 당시의 경성을 재현한 이 영화의 볼거리는 관객에게 압도감을 준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경성역, 화신백화점 앞 거리를 재현한 식민지 근대의 풍경은 한국영화의 특수효과 기술력에 찬탄하게 된다. “애초에 없는 것을 CG가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실사로 찍은 소스가 충분하면 연출자의 마스터플랜이 충실했다는 전제 하에 한국의 CG 기술은 대단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고 정지우는 말했다. 그렇지만 개봉 전부터 언론을 타고 유통됐던 그의 말, “일제 하 경성의 랜드마크를 보여주겠다”던 그의 호언장담은 풍경에 인물이 묻히는 위험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던보이>의 대단한 스펙터클은 그 자체로 나르시시즘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이물감이 대중영화로선 위험한 지점이다. 관객은 빨리 인물의 감정에 동승해서 스토리 전개에 빨려 들어가고 싶은데 영화는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지점으로 관객을 안내하면서 그때마다 대단한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조난실은 이해명과 함께 백화점 옥상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해명이 미필적 고의로 사주한 납치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고문당해 몸과 마음을 못 쓰게 된 사촌오빠를 모시고 식사를 한다. 그들의 어색한 저녁 식사 자리를 비추는 카메라의 높은 부감시점으로 경성 복판의 화려한 거리 풍경이 세세하게 재현된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떤 감정을 이입받아야 할지는 당장 난감하다. <모던보이>는 식민지 상태의 왜곡되고 굴절된 경로로 펼쳐진 근대 풍경 속에서 감지되는 거대한 공허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영화가 아니다. 또한 독립운동을 하는 조난실과의 사랑에서 부분적으로 이해명이 변해가듯이 조국의 독립에 대한 애국주의를 바탕에 강하게 깔고 있는 영화도 아니다. 그런 것들이 다 섞여 들어가 있지만 전면화되어 있지도 않다. 굳이 추측하자면 이해명의 소박한 바람, 조국의 독립도 좋지만 그저 둘이서 사랑하는 관계로 살아가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 속에 이 왜곡된 근대의 풍요가 억누르는 이상한 질식 상태의 황홀이 자리하는 것이다.
근대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라이프스타일이 표상하고 지향하는 개인의 자유주의는 이 체제 하에서는 기실 껍데기뿐인 것이다. 이해명과 조난실이 아무리 폼을 잡고 있어도 찌질하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아무리 우스꽝스럽더라도 그들의 사랑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지우는 이 상태를 몽환적인 혼돈 그 자체로 제시할 뿐 굳이 구획 정리를 하지 않는다. <사랑니>에서 구조주의자로서의 능통한 감각을 보여줬던 그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이 모호한 상태에서의 폭발성을 <모던보이>의 매력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펼쳐지는 극적 폭발의 단계는 그래서 상당히 인화성이 있다. 대동아 전쟁의 기치를 올리며 일본 권력자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고 난 후 이런저런 소동극 끝에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유명한 일본 군가 자락이 무대 뒤의 남녀 주인공 이해명과 조난실의 육체를 휘감아 들어올 때,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그들 사랑의 운명을 헤아릴 때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세심하게 파고 들어가는 것이 정지우 연출의 힘이다.
한국에서 정지우와 같은 유형의 감독들에게는 대중지향적인 대작영화를 만들면서도 자기만의 임계점을 정해놓고 끝까지 씨름하는 본원적인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이야기의 개연성과 캐릭터 감정의 명확성은 모든 시나리오 교과서에서 이런저런 테크닉을 쓰라며 설교하는 항목이지만 그게 현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예술적으로 앙상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감독이 창조주의 입장에서 세계를 재단하기보다는 탐구자의 입장에서 세계에 접근해 들어가는 게 맞다고 보는 예술가의 태도인 것이다.
리얼리티의 모호한 지점에 대해 해석을 유보하고 장르 규범에 맞는 스토리 전개에도 신경을 쓰면서 1930년대 경성의 모던한 라이프스타일에 숨어 있는 거대한 공허의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다가 폭파시키는 <모던보이>는 사랑 이야기와 역사적 관점의 경계를 뭉개버린다. “시나리오를 수없이 고치면서 이 영화만큼 모니터가 무용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의견이 둘로 쫙 나뉜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어떤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그런 것은 지겹고 상투적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원작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는 전자의 입장에 가깝게 서술된다. 가볍고 경쾌하게 식민지 시대를 횡단하며 영화 속에서도 나오는 이해명의 대사, ‘낭만의 화신’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젊은이의 존재를 끝까지 긍정하고 밀어붙이는 쪽이다. “나는 거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원작의 결론을 수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봤다. 그렇다고 그 시대에 대한 관점을 무시하는 것도 곤란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영화 <모던보이>의 버전이다.”
